1. 익숙함의 미학 

나는 스타벅스를 좋아한다. 공간의 익숙함 때문이다. 스타벅스는 어딜 가도 비슷하다. 합정점이나 부천점이 크게 다르지 않듯이 일본의 교토와 태국 치앙마이의 스타벅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그들이 스타벅스를 좋아하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고 했다. 마치 시공간을 이동하는 포털처럼 비슷한 인테리어와 비슷한 냄새, 비슷한 음악과 비슷한 맛. 스타벅스를 선택하는 것은 새로운 곳을 선택하는 데 뒤따르는 노력(검색)과 두려움-평균보다 맛없고 불편한 곳에서 시간을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는-을 미리 차단해 준다. 그러나 스타벅스를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계절마다 쏟아져 나오는 MD 굿즈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다. 매번 열심히 내놓기는 하는데 구리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마치 2000년도 초반에 디지털 인쇄가 발달하면서부터 마구 쏟아져 나오던 구린 간판들-그라데이션과 이상한 폰트로 이루어진-을 볼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애플을 제외하고는 디자인 선진국이라 보기 어려운 미국 기업이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한국에 와서 더 구려진 걸까. 가끔은 스타벅스를 좋아하는 덕심으로 뭐 살 게 없나 기웃거리다가도 포기하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충동적으로 매우 심플한 텀블러를 하나 샀다. 스터디 때문에 스타벅스에 유독 자주 다니던 때였는데, 매번 머그컵에 주문을 해도 종종 일회용컵에 담아주는 게 번거로워 텀블러를 사기로 한 것이다. 처음에 산 텀블러는 아래의 그림과 달리 직선으로 쭉 뻗은, 가장 심플한 타입의 스테인리스 텀블러였다. 디자인도 나쁘지 않았다. 한동안 그 텀블러를 썼는데, 텀블러라는 것이 얼마나 실용적이고 좋은 물건인지 깨닫는 계기였다.  


2. 스테인리스 텀블러의 실용성

스테인리스 텀블러의 장점은 일단 보온성과 보냉성이다. 차가운 음료는 차갑게, 따뜻한 음료는 따뜻하게 오랫동안 즐길 수 있다. 완벽하게 밀폐가 되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넘어졌을 때 바로 줄줄 새지는 않는다. 뚜껑을 완전히 닫았을 때 어느 정도 안정성이 보장된다고 하겠다. 텀블러를 산 뒤로는 집에서 물을 먹을 때에도 텀블러에 담아 먹는다. 여름에는 시원해서, 겨울에는 따뜻해서다. 또 일반 컵보다 용량이 많으니 자주 따라먹지 않아도 되고, 물을 떠 놓아도 먼지가 쌓일 일이 없다. 뚜껑을 여닫는 불편함도 없다. 게다가 스타벅스에서 음료를 시키면 300원(맞나?) 할인까지 해주니 금상첨화가 아닌가. 그러나, 텀블러의 르네상스는 아직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다소 흉하다고 생각했던 아래의 텀블러를 사면서부터 나는 스타벅스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외관은 특별하지 않다. 몸체는 스테인리스, 뚜껑은 검은색의 폴리프로필렌으로 이루어져 있다. 스타벅스 커피라고 써있는 밑바닥 부분은 실리콘이어서 마찰 때문에 쉽게 넘어지거나 밀리지 않는다. 용량은 473ml(16온스)로 넉넉한 편이지만 잡았을 때 많이 크지 않고, 가방에도 무난하게 들어간다. 뚜껑이 좁지 않아서 웬만한 음료를 주문해도 어려움 없이 담을 수 있다. (보온병 형태의 입구가 좁은 텀블러들은 휘핑크림을 얹거나 프라푸치노 같은 걸죽한 음료를 담는 데에 어려움이 있다. 나의 어려움은 아니지만 쓰임새가 편리하다고 볼 수는 없는 부분이다.) 여기까지는 이전에 쓰던 텀블러와 크게 차이가 없다. 


위의 텀블러를 사용해 본 결과, 텀블러는 직선인 것보다 허리가 들어간 곡선 형태의 것이 더 실용적이었다. 직선 형태의 텀블러는 디자인은 예쁘지만 용량이 적거나 둔해 보이고 손이나 텀블러에 물기가 있을 경우에는 미끄러지기 쉽다. 생각 이상으로 음료가 무거울 때, 무심코 헛손질을 할 때가 있다. 텀블러에 커피나 음료를 마실 때에는 대부분 다른 일을 하고 있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이런 부분까지도 장점이 된다. (단지 차를 마시는 시간이라면 무엇하러 멋없이 텀블러에 마시겠는가. 아름다운 찻잔과 티포트가 있는 것을.) 첫인상은 별로였지만 요즘은 손에 착 감기듯이 잡히는 저 곡선에서 즐거움을 느끼게 되었다. 더구나 이것이 공산품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만한 용량의 텀블러는 둘레가 커서 손이 작은 사람에게 다소 불편할 수 있는데, 곡선의 텀블러는 '가장 둘레가 작은 부분'이 존재하므로 손이 작은 사람에게 좀 더 편리한 부분이 있겠다. 


3. 배려하는 디자인의 뚜껑

그러나 이 텀블러의 진면목은 바로 뚜껑에 있다. 음료가 나오는 부분의 구멍이 모가 둥근 삼각형 모양이라서 음료를 따를 때 잘 안나오거나 한 번에 쏟아지는 일이 적다. 특히 위쪽에 난 작은 구멍은 음료가 나올 때에 공기가 통하는 것을 도와준다. 찬 음료라면 상관 없지만 뜨거운 음료일 때는 천천히 기울여 구멍 속으로 공기가 들어가도록 하면서 마시는 것이 좋다. 특히 겨울에는 티포트 대신에 텀블러를 쓰는데, 커피나 차가 오랫동안 식지 않아서 마지막까지 따뜻하게 마실 수 있다. 그런데 단순히 물을 마실 때에도 이 텀블러를 쓰는 이유 중 하나가 있다. 



신발을 신을 때 ‘착화감’을 따지듯이 물을 마실 때에도 ‘음용감’을 따진다면, 이 텀블러의 음용감은 상당히 높다고 말할 수 있다. 몸체를 쥐고 기울였을 때 입술이 벌어지면서 음료가 흘러들어가기까지 옆으로 물이 샐 틈이 없다. 왜냐하면 입술이 닿는 부분이 자연스러운 곡선으로 패여 있어 음료가 입술의 측면으로 흘러가는 것을 막기 때문이다. 또한, 뚜껑을 뒤집어 보면 음료가 나오는 구멍이 있는 쪽으로 내부가 기울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텀블러를 기울였을 때 음료가 구멍으로 모이는 것을 도와준다. 뚜껑을 대충 닫거나 잘못 닫았다고 하더라도 음료가 측면으로 새는 양을 덜어주는 것이다. 


이 텀블러를 디자인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이에게 무한한 찬사를 드리고 싶다. 그는 아마 감각에 민감한 사람일 것이다. 손에 쥐는 감각, 입술에 닿는 감각, 마시는 감각. 차를 음미한다는 것은 단지 그것의 맛과 향만이 아니라 당시의 기분을 음미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텀블러는 마시는 행위에 편안함과 즐거움을 더해준다. ‘배려하는 디자인’이란 과연 이런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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